Wednesday, May 28, 2014

예수님의 증인이 되자

저는 오늘 루가복음 24:48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증인이 되자’라는 주제로 설교를 합니다.
증인이라는 말은 ‘사실, 사안에 대해서 그것을 증명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증인은 시시비비를 가릴 때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증인의 유무에 따라 어떤 일이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단순한 교통사고에서부터 살인사건에 이르기까지, 개인간의 작은 문제는 물론 회사간의 큰 문제도 그것을 증명하는 증인의 유무에 의해 희비가 갈리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48절에서 ‘You are witnesses of these things(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3: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으로 인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것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면 ‘소명(Calling)’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증인’이라고 하셨을까요? 이 말은 예수님께서 나를 필요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해야할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할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어떤 일일까요? 우리가 어떤 일의 증인이 되어야 할까요?
46~47절, 성서에 보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
첫번째는,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증인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는 것을 매우 어려운 일이니다. 이 일은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제자가 도마입니다. 
요한복음 20:24-29절,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예수님 부활의 사건은 성서에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목격자들이 있고, 증인들이 있기 때문에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가 성서를 눈으로만 읽었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잠시 성서의 말씀이 나에게 비춰지다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45절,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서를 깨닫게 하시고…
부활의 확신이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마음으로 읽는다는 것은, 성서의 말씀,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적을 하나하나 마음에 새겨본다는 것입니다.그리고 내 삶에 비추어 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내 삶으로 만들어 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내 삶이 될 때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성서를 읽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성서를 읽으시기 바랍니다. 눈이 아닌, 마음으로 성서를 읽는 교우님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어떤 행동을 보였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었고, 무서워서, 두려워서 한 곳에 모여 문을 잠그고 숨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경험하고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간 것입니다.
모두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시기 원합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기를 결심하는 교우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번째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가르침의 증인이 될 수 있을까요?
무엇인가를 남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해 확신이 있어야 하고,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선거에서 누군가를 선택할 때, 가장 큰 기준이 되는 것은 그 후보에 대한 믿음,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고, 마지막 심판날에 구원받을 것이라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남에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확실하게 믿을 수 있을까요?
들어야 합니다. 뭘 듣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자라납니다. 이 믿음은 살아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굳건해집니다.
어느 정도로 굳건해질까요? 
베드로를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그는 세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정했던 사람입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미리 베드로에게 말씀을 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절대 아니라고, 절대로 예수님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펄펄 뛰던 사람이 막상 현실에서는 세번이나 부정을 했습니다.
이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는 어떻게 되었습니다. 태산보다도 강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가 로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다가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과 같은 방법,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참으로 고통스런 죽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죽을 자격이 없다고 자신을 꺼꾸로 매달아 달라고 했고 더 큰 고통속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렇게 강한 믿음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눈으로 읽지 말고 가슴으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가슴으로 읽는 말씀을 통해 교우님의 믿음이 굳건해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해 주십니다. 그런데 축복을 받기 전에 할 일이 하나있습니다. 예수님은 축복을 해 주시기전에 제자들을 예루살렘에서 베다니아 근처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베다니아는 어디일까요? 예루살렘성에서 감람산 동쪽 기슭이고, 예수님 승천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곳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나가셨을까요? 그냥 그 자리에서 축복을 하시면 좋을텐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가지고 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예루살렘뿐 아니라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손을 들어 축복하셨습니다. 
50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이 축복은 제자들의 증인으로서의 활동이 인간적인 사역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되는 것이며, 이 사역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축복이었습니다. 이 축복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어집니다.

지금 이 시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증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손을 들어 축복하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의 축복에 아멘 하고 응답하시는 교우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교우님에게 다시 한번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Monday, May 26, 2014

바른 길은 어디일까?

Which way is the right way?
John 14:1-14

저는 오늘 John 14:6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을 중심으로 교우님들과 함께 바른 길이 어디인지를 찾아보고 싶습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시골의 작은 마을을 방문해서 부흥집회를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편지를 보낼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지나던 소년에게 우체국을 물었보았고, 소년에게 감사의 말을 하면서 “내가 오늘 저녁 교회에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는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는데 와서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I don’t think I’ll be there. You don’t even know your way how to the post office.” 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말에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충격을 받고, 깊은 묵상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정말 내가 가는 길이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는 것인지, 그리고 교우들을 인도하는 것인지 자성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매우 한정적입니다. 한정적인 삶을 살면서도 매순간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은 매일매일의 선택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택을 통해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처음 우리의 삶은 단순했습니다. 창세기 2:8절 이하에 보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삶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은 바른 길을 아는 것이고, 바른 길을 가게 됨으로 우리의 운명에 도달하게 만듭니다. 내가 가는 곳에는 수백개, 수천개의 길이 있습니다. 어떤 길이 바른 길이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사실 어떤 길이 바른 길인지 모르면서 길을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길을 가면 갈수록 삶이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마치 “경우의 수”를 찾아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개의 길이 두 갈래 나뉘면 네 갈래의 길이 되고 또 둘로 나뉘면 여덟개의 길로 만들어집니다. 또 둘로 나뉘면 열여섯개, 서른 두개… 가면 갈수록 복잡해지고 어려워집니다. 그러다 길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이 모습이 나의 삶이라고 생각해보신 적이 없으신가요?

지금까지의 인간의 경험, 철학, 믿음이 찾고자 했던 명제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죽음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어느 길이 옳은 길인가?”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시작은 우리의 어린 시절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의 전통, 사회전통, 그리고 각자가 가진 종교적 배경으로부터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를 찾게 됩니다. 

성장하면서 우리의 시야는 점점 넓어지고, 사회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복잡한 삶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동시에 복잡한 삶은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우리가 복잡한 삶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동안 우리는 점점 하느님의 생각에서 멀어진 삶을 살게 됩니다. 

"For my thoughts are not your thoughts, neither are your ways my ways," declares the LORD. (Isaiah 55: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우리의 목적지가 “영원한 하늘나라”라고 한다면, 누가 우리를 거기에 가장 잘 데려다 줄까요?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All roads lead to Rome.” 내가가지고 있는 종교관, 생활관, 가치관이 이 말과 다를까요? “모든 길은 하느님으로 통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지 않는가요? 이런 가치관, 신앙관이 나를 하느님으로 인도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다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 뿐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이 단순한 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세상을 변화시켰고, 이웃을 변화시켰고, 나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Do to others as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Luke 6:31)(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Love your enemies.(Matt 5:44)(원수를 사랑하라)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지 종교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삶에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열쇠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욱 그를 갈망하는 것이고, 그와 함께 하는 경험을 갖는 것입니다.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예수님은 자신을 “the only way.”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영원한 하늘나라를 향한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을 향한 여정은 개인의 여정입니다. 나의 여정입니다. 어떤 원칙도 아니고, 연습도 아니고, 처세술도 아닙니다. 철학이나 이념도 아닙니다. 이 여정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말로 하느님의 이름을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Yahweh”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to be” 또는 “the self-existing one” 예수님은 이 이름을 가르켜, “Salvation is found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to men by which we must be saved” (Acts 4:12).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이 말씀을 믿었고, 이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I am come that (men) may have life, and that they may have it more abundantly”(John 10:10)(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높고 귀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삶은 연합이고, 죽음은 분리입니다. 사람은 육신과 영혼, 두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은 이 둘을 처음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작업입니다. “티끌로 된 몸은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아가고 숨은 하느님께 받은 것이니 하느님께로 돌아가리라.”(전도 12:7) 육신의 죽음은 먼지가 되어 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은 하느님과 함께 연합하게 됩니다. 반대로 영적인 죽음은 하느님과 분리되는 것을 말하고, 그 결과는 어둠과 절망속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 것이다.”(마태 25:46)

에던 동산의 삶에서 이미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죄의 죽음으로, 사탄의 발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구원자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탄의 유혹에 현혹되는 삶을 살고 있지만, 예수님은 이를 돌이키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죽음에 놓여 있지만, 예수님은 부활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타입의 교우님들이 여기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줄여서 세 가지로 말씀드립니다. 충분히 내 삶을 내가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우님, 내가 지금 가진 것으로 충분히 내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우님, 마지막으로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은혜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우님. 어떤 교우님이신가요?

예수님은 마태 7장에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정의로 된 좁은 길이고 둘째는 인간의 정의로 된 넓은 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은 어떤 길로 갈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산상수훈의 핵심은 아주 분명합니다. 사상누각을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누각이지만 바람이 불면 곧 무너지는 것과 같은 삶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을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비가 냐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마태 7:24~25)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 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 드는 사람이 적다." 고 친절하게 어떤 길이 옳은 길이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 자신을 죽여서 보여주셨습니다. 

좁은 길이 절망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보여주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걷던 그 길은 절망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자 절망의 길에서 희망의 길로 바뀌었습니다. 두 제자는 자신이 가고자 했던 길에서 돌이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들의 경험을 전파합니다. 

지금 내 삶은 바른 길로 가고 있습니까? 잘 모르신다고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해 보십시요. 예수님께서 하신 일도 모르겠다고요?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묻히셨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 오셨습니다. 왜 다시 왔을까요? 아직도 세상의 유혹에서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오신 것입니다. 죽음에서도 승리하신 분이 나에게 바른 길을 보이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지금 힘드십니까? 걱정이 많으십니까? 

오늘 복음의 시작과 끝말이 어떤 말인지 기억하십니까?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 주겠다.”



지금의 걱정, 고통 그리고 안개속에 있는 것 같은 희미한 내 모습, 내 신앙이 오늘 말씀을 통해 희망과 기쁨, 축복이 넘치는 삶으로 변화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가수 알리님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듣고...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80년대에 가수 조용필님이 부른 대중가요입니다. 새로운 형태의 시도와 조용필님의 가창력으로 큰 사랑을 받았던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를 알리님이 새롭게 해석을 해서 불후의 명곡이라는 TV프로그램을 통해 불렀습니다. 
전 TV프로그램을 즐겨보는 편이 아니라 그때는 몰랐는데, 우연하게 노래를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숨을 쉴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10번도 더 들은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가창력에 놀라고, 두번째는 새롭게 해석된 음악에 놀라고 마지막에는 새삼 다가오는 가사가 주는 철학적 메시지에서 놀랐습니다. 
조용필님이 부를 때보다 알리님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감상하는 노래는 저에게 완전히 새로운 곡이었습니다. 지금 내 심정을 정확하게 노래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이 넓은 미국땅에 혼자 남겨진 내 모습, 갈길몰라 방황하는 나를 향해 부르는 위로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 가사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 거리는 하이에나를
본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죽는 눈덮인
킬리만자로의 그표범이고 싶다
자고 나면 위대해 지고 자고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있다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한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묻지마라 왜냐고 왜그렇게 높은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이 없으면
또 어떠리

살아가는 일이 허전하고 등이 시릴때 그것을
위안해줄 아무것도 없는 보잘것 없는 세상을
그런 세상을 새삼스레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건
사랑때문이라구 사랑이 사랑을 얼마나 고독하게
만드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지
사랑만큼 고독해 진다는걸 모르고 하는 소리지
너는 귀뚜라미를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귀뚜라미를 사랑한다
너는 라일락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라일락을 사랑한다
너는 밤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밤을 사랑한다
그리고 또 나는 사랑한다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찬것 같으면서도 텅비어 있는 내청춘에 건배

사랑이 외로운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것
모두를 건다는건 외로운 거야
사랑이란 이별이 보이는 가슴아픈 정열
정열의 마지막엔 무엇이 있나
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않는것
그래야 사랑했다 할수 있겠지

아무리 깊은 밤 일지라도 한가닥 불빛으로
나는 남으리 메마르고 타버린 땅일 지라도 한줄기 맑은
물소리로 나는 남으리 거센 폭풍우 초목을 휩쓸어도
꺾이지 않는 한그루 나무 되리
내가 지금 이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

구름인가 눈인가 저높은 곳 킬리만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매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면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